필립 안 커디 “도산의 유산은 훌륭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도산의 6번 투옥과 고문…한국을 위해 평생 헌신
-독립운동과 위안부 문제 공격은 도산의 역사를 공격하는 것”
-독일의 소녀상 철거 계획, 부끄러운 일…일본 반대 때문에 철거할 이유 없어
-임시정부에서 탄핵되고 독립운동가들 위험에 빠뜨린 이승만의 기념관 건립 반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안 커디 씨가 JNC TV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의 정치 현안, 할아버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수감 생활과 독립운동, 그리고 그가 지켜나가고 있는 도산의 유산에 대해 자세히 전했다. 필립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도산 기념사업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과 도산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독일의 평화의 소녀상 철거 계획에 대한 질문에 필립 씨는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소녀상은 역사를 상징하며, 일본인들이 이러한 동상에 지속적으로 반대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역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에는 일본 역사를 기리는 기념물들도 존재한다”며, 일본이 반대한다고 해서 철거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필립 씨는 “동상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며, 이 사건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라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에서 일부 고위 관계자들이 위안부 강제 동원의 사실 여부에 명확히 답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역사 부인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명백한 불의이며, 대부분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필립 씨는 한국 정부 내 친일파의 영향력이 커지며, 최근 친일 행위가 더욱 심해진 상황을 우려하며 “독립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공격하는 것은 도산의 역사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위안부 역사의 증언과 피해 사례가 많아질수록 정부가 부인하기 힘들어진다고 강조하며, “지금 한국 정부에는 진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비판했다.

필립 씨는 도산이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겪은 고난을 상기하며 “도산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2년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도산은 감옥에서 모범수로 인정받아 1935년에 조기 석방되었고, 수감 중에도 ‘생산적인 삶’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글을 쓰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필립 씨는 도산이 대전형무소에 있던 당시 전통 칠기로 만든 그릇에 ‘애기애타(愛己愛他)’라는 글귀를 새겨 교도관에게 선물했다는 일화를 전하며, 도산의 애국심과 인류애가 깊이 배어 있음을 강조했다.

필립 안 커디 씨는 이승만을 독립운동 영웅으로 평가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에 반대하며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필립 씨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승만은 1920년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고, 당시 도산 안창호를 체포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독립운동가들을 위험에 빠뜨린 인물”이라고 말했다. 또한, 필립 씨가 보유한 역사적 문서에는 이승만이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를 볼셰비키로 몰아 미국 내 안보 위협으로 비난한 기록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필립 씨는 도산의 유산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산 선생은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지만, 현대 한국에서 그 가치가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도산은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조직하며 군사 전략가의 역할도 맡았다”며 최근 논란이 된 두 장군의 정치적 편향 논란을 반박했다. 그는 “도산은 독립운동의 모든 측면에 헌신한 인물로, 그의 청사진은 군사적 역할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필립 씨는 “도산의 편지와 사진 자료 등을 기념관에 기증했지만, 일부 자료들이 한국 내에서도 제대로 전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필립 씨는 “도산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중 일부는 잘못된 설명이 붙어있고, 교체를 요청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며 기념관의 관리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도산의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필립 안 커디 씨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한 박물관과 협력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기념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며, ‘도산컵 서핑 대회’와 같은 행사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dosan.org를 운영하며 도산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도산과 한국의 역사를 기리는 티셔츠를 제작하고, SNS와 유튜브를 통해 도산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필립 안 커디 씨는 “도산 선생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며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그의 정신을 이어가길 바란다”고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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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우선, 독일이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할 계획이라는 슬픈 소식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1: 저는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녀상은 역사를 상징합니다. 일본인들은 항상 그런 동상들에 반대해 왔습니다. 저는 글렌데일에 있는 소녀상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뤘기 때문에 그 반대 의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를 상기시켜 줍니다.

독일에는 일본 역사를 기리는 다른 기념물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그 동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철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많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래전에 많은 한국인들이 간호사나 광부로 독일에 갔고, 일본과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역사, 그리고 독일인들의 한국에서의 역사도 있죠. 그래서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상은 그대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동상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며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질문 2: 최근 한국에서 고위 정부 관계자들이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는지 자발적으로 갔는지 명확히 대답하지 못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2: 저와 어머니는 1991년이나 1992년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LA에서는 정치적인 일들이 있었는데, 폭동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른 문제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과 기념비를 조직하려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정부 내 친일파가 정치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 최근 친일 행위들은 몇 년 전보다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제가 8월 15일 기념을 위해 한국에 있을 때, 독립기념관 관리 문제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 이야기를 꺼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한 두 명 갔다고 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역사의 대부분은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일본이 저지른 불의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중국인 피해자가 나타나면서 위안부 운동이 더욱 탄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중일전쟁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발생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요. 일본의 여성 성범죄는 한국에서 발생한 중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추가할 수 있는 위안부 역사가 많습니다. 현재 활동가들이 주장하는 위안부 역사를 더 추가할수록, 정부가 이를 부인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지금 한국 정부에는 진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명확히 존재합니다.

한국 정부 인사들의 역사 부인 행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한 회의에서 만난 변호사에게 “지금 한국에서 도산 안창호의 직계 가족은 저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 소장품을 관리하고 있으며, 다른 일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국 역사와 다른 것이 발견될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독립운동과 위안부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도산의 역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도산은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도산은 1896년부터 여성들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한두 명 자발적으로 갔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해도, 저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역사의 대부분은 한국 정부에 의해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3: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답변 3: 도산의 철학과 제 철학은 역사는 진실이 아니면 역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산은 진실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성실함과 용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은 역사를 따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유는, 외부의 압력이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 있기 때문이죠.

질문 4: 도산 안창호는 한국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도산이 감옥에 있었던 시기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도산의 수감 횟수, 수감 기간, 그리고 수감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4: 도산이 제 할아버지인 것과 상관없이 제가 공부한 한국 역사와 한국계 미국인 역사를 살펴보면, 도산은 단순히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 아니라 핵심 인물입니다. 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합한 인물입니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세 개의 다른 임시정부가 있었는데, 사회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모두 도산을 존경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의 모든 사진에서 도산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신민회를 시작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독립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민회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의 독립협회와 관계도 있었습니다. 도산은 독립협회 회원이었습니다.

도산은 제가 아는 바로는 6번 감옥에 갔습니다. 다른 자료에서는 더 많은 수감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만, 정확하지 않으므로 그 부분은 제외하겠습니다. 도산이 처음으로 체포될 뻔한 것은 1898년이었습니다. 그때 행상 조합이 왕이나 일진회에 의해 독립협회를 방해하러 보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그때 감옥에 갔고, 독립협회의 다른 회원들도 갔습니다. 그러나 도산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도산은 너무 어렸고 구세학당의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독립협회를 이끄는 가장 활기찬 청년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 운 좋게도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사건은 안중근 의거였습니다. 1909년에 도산은 체포되었고, 제가 알기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고,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도산은 총 51일간 수감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그들은 도산이 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었다고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산이 연루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도산 안창호 전집의 5권 289페이지에서 흥사단 회원 차의석의 심문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이 기록은 신민회 활동의 일환인 대성학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학교는 한국인들에게 암살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 책에는 도산이 총을 구매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도산은 이전에 안중근과 만남을 가졌고, 그리고 도산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를 원한 이유는, 1907년에 도산이 이토 히로부미와 만났을 때, 이토는 그에게 꼭두각시 정부에 참여하라고 제안했으나, 도산은 “난 그렇게 하지 않겠소. 당신들은 이웃처럼 지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고 있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합병이 곧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산은 이토가 한국을 병합하려는 계획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 후 도산은 한국을 떠나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도산은 1919년 상하이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5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승만은 탄핵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1926년에 이승만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도 발부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은 이미 상하이를 떠나 하와이로 왔고,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이승만 기념관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윤 대통령이 이승만을 독립운동 영웅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 정부 외부의 연구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 문서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도산이 암살 관련해서 미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08년에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의 책에 도산이 암살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암시가 나옵니다. 그래서 거의 아무도 도산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925년에 이승만은 시카고에서 도산을 체포하게 했습니다. 이승만은 도산이 볼셰비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했습니다. 도산의 체포는 모두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슈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UC 리버사이드에 에드워드 태한 장이라는 교수가 있는데, 그는 리버사이드를 첫 번째 한인 타운이라고 주장하며, 도산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UC 리버사이드의 김영옥 한국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김영옥 대령의 아버지는 도산을 감옥에 가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동지회 소속이었고, 국민회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흥사단 소속도 아니었습니다. 레인 김이 쓴 『동방에서 미국으로』라는 책에서 김 대령은 모든 장로교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도산은 장로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체포는 도산이 다시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가 다시 돌아와서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조직하는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김구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도산은 지린에서 활동가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알아차리고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일 운동을 선동한 혐의로 투옥됐습니다. 그는 다시 풀려났습니다. 그는 풀려나서 상하이로 돌아가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체포는 윤봉길과 관련된 훙커우 공원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32년에 도산이 그 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이 도산에게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도산은 항상 조심해야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항상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도산이 얼마나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항상 숨어 다녀야 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도산은 특정 시기에 자신이 떠났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되었는데, 한 소년에게 선물을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아마 어린이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면 안 되는 곳에 다시 갔고, 일본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는 것 같아요. ‘미스터 션샤인’인지 다른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산이 체포되는 장면이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지금 그들이 당신을 쫓고 있어요’라고 경고하려고 하는 장면이 있죠. 그건 오랜 시간 지속된 일이었습니다. 도산이 1911년에 떠난 후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수 신분으로 서울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는 경무국에 갔다가 종로 경찰서로,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서대문형무소로 갔습니다. 결국 그는 대전으로 이송되었으며 대전형무소에서 거의 3년을 보냈습니다. 그에게 씌운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이었습니다. 도산이 재소자로서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그에게 매우 우울한 일이었습니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그는 집에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저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서 그의 감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관 모양의 감방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그 감옥이 고통스럽고 형벌이 잔인했는지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최근 8.15 행사 때 대전형무소를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요.

거기에는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산은 1935년쯤 그곳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는 모범수였기 때문에 일찍 석방되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감옥에 있을 때도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서 뭔가를 했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제가 한국에 갔을 때, 2009년이었는지 2013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버지가 대전에서 교도관으로 일했는데, 도산이 그 교도관에게 전통 칠기로 만든 그릇을 선물했습니다. 그 그릇들은 서로 맞물리게 되어있는 형태였어요. 또한 도산은 그것에 ‘애기애타(愛己愛他)’라는 글귀를 남겼습니다. 도산은 그곳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쓰며 활동을 했지만, 고문도 당했습니다.

장리욱이 쓴 글에 따르면, 한겨울에 도산을 끌어내서 감옥 셔츠와 바지만 입힌 채로 호스로 물을 뿌려 그가 얼어붙을 때까지 밖에 방치한 뒤 다시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35년에 도산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체포는 1937년에 있었는데, 수양동우회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15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동우회는 흥사단과 비슷한 항일 조직이었습니다. 도산은 이전과 동일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도산은 병에 걸려 폐 질환과 결핵을 앓았고, 평생 동안 결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를 들고 있는 그의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도산은 1909년에 안중근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이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 번도 오렌지를 따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1911년에 그가 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의사의 보고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산은 결핵과 복막염, 또 다른 폐 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도산은 1937년 12월 24일에야 병보석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또한, 도산이 회복하지 못하도록 일본이 유리를 갈아 그의 음식에 넣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도산을 감옥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서 죽으면 사람들을 자극해 다시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도산의 마지막 수감 시기입니다. 도산은 결국 1938년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산은 한국을 위해 진정으로 희생했고, 한국을 사랑했으며, 한국인들을 사랑했습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도산은 집에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다섯에서 여섯 통 정도의 편지였고, 그중 일부는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품위를 지켰습니다. 도산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웠습니다.

질문 5: 알겠습니다. 그러면 방금 말씀하신 것 외에, 도산의 감옥 생활과 독립운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나 가족 유품이 있나요?

답변 5: 제 웹사이트 dosan.org에 1935년의 편지 사본이 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독립기념관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1984년에 그 컬렉션을 보냈습니다. 재미있는 건 한국 정부에서 집에 대표자를 보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 했을 때였습니다. 할머니가 보관한 수천 통의 편지와 사진을 보고 그는 매우 놀랐습니다. 할머니는 도산에게서 받은 편지들과 대전에서 온 편지들을 모두 간직하고 계셨죠.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기증했습니다.

독립기념관 웹사이트에서 도산이 대전형무소로 가기 전, 일본에 의해 수감 중 심문을 받은 재판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산기념사업회인지 흥사단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말한 그 검은 그릇의 사진이 거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도산기념관에서는 이 검은 그릇의 복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도산공원에 있는 박물관에서 그 검은 그릇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계신 분들은 꼭 방문하거나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세요. 이것들은 도산이 대전형무소에서 했던 일들을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유물입니다.

앵커: 저도 도산공원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네요. 다음번에는 꼭 확인해보겠습니다.

필립 안 커디: 제가 박물관 전시와 사진 전시 작업을 해왔는데, 도산기념관의 전시는 잘 관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바꿔 달라고 몇 번을 요청했거든요. 제 숙모 수라와 할머니의 사진인데, 그걸 저희 어머니라고 적어 놨어요. 그런데도 바꿔주지 않습니다. 그 그룹 중에서 제 어머니를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죠. 그 사람은 둘째 딸인 수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꾸지 않습니다. 잘못된 날짜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들 중 일부는 제가 기증한 실제 유물들이에요. 대부분은 독립기념관에서 가져온 복제품이지만요. 아쉽게도 제가 더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직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 유물들을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의미가 있을 텐데, 그곳에서 잘 전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기는 싫지만요.

앵커: 그 사람들 참 부끄럽네요.

질문 6: 도산의 손자로서, 오늘날 한국에서 그의 유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6: 도산의 유산은 훌륭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도산의 유산은 검열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권리요. 도산은 1896년에 여성 권리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요. 도산은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암살이나 군대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도요.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산과 함께 일했습니다. 도산이 독립군을 조직했습니다. 독립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친필 청사진이 있으며, 완전한 군사 임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산은 군사 전략가의 면모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도산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유물 중 하나는 곽님대 씨가 연필로 쓴 두 권짜리 노트로,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술에 관한 내용입니다.

도산은 누구나 성경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도산은 교육을 정말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도산은 많은 사회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박근혜, 전두환, 노태우 같은 사람들이 도산의 철학에 부합했을까요? 아니죠. 저는 지금 전두환을 연구하고 있는데, 끔찍합니다. 그것이 ‘전두환이 독립기념관을 만들었던 이유가 그가 광주에서 저지른 일을 덮으려는 시도였다’고 제가 생각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도산의 유산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갔을 때, 30대에서 50대까지의 많은 젊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부모님은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고, 올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었죠. 역사를 옹호하려 했다면 아마도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용산과 광화문에서 사업하는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죠. 하지만 SNS나 유튜브 같은 채널이 열리면서, 젊은 세대들이 정보에 더 잘 접근하게 되었고, 진실을 알고 싶어 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과 도산에 대해 이야기하면, ‘왜 우리가 이걸 몰랐을까?’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 이 집에 와서 자료들을 보면서, ‘잠깐만요, 더 알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들 중 몇몇은 도산이 역사책에 한 페이지로, 시험 문제로 한두 번 언급될 뿐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라고요. 도산이 한국을 개혁하고 구하려고 싸웠던 젊은 사람이자 훌륭한 분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점차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가도록 돕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도산의 유산에 대한 의견입니다. 존경받고 있는 건 맞지만, 알려져야 할 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질문 7: 도산은 정말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도산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답변 7: 새로운 박물관과 협력해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유물을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하나는 1942년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가 작성한 8페이지 분량의 문서인데, 이 문서에는 1915년부터 그 시점까지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서는 이승만 기념관의 내용과 완전히 모순됩니다.

서울의 박물관에 몇 가지 유물을 전시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안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압구정은 제외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너무 부유하고 혼잡해서 일반인들은 가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금 협의 중인 장소가 있는데, 잘 되면 서울에서 독립운동과 도산을 기념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또 다른 계획은 서핑을 할 수 있는 시흥 웨이브 파크와 준비 중인데요. 이곳과는 개장 초기부터 협력해 왔고, 도산컵 서핑 대회를 개최하려 합니다. 제대로 운영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후원을 찾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후원은 미국과는 다릅니다.

저는 여기서 20년 동안 서핑 대회를 열어 왔고, 꽤 큰 규모의 프로와 아마추어 대회도 주최했습니다. 또한 도산과 다른 역사적 인물을 담은 티셔츠를 제작하려고 해요. 이런 티셔츠들이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교훈을 주길 바라고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걸 ‘역사가 중요하다’라는 주제 아래 모으려고 해요. 웹사이트도 유지하면서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롱비치에 있는 비행 조종사 훈련 학교에 가기 위해 한국에서 온 5명의 청년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어요. 또 이번 주에 팟캐스트 두 개를 녹음했고, 6월 29일에는 샌디에이고에서 강연도 했습니다. 양국에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어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힘들기도 해요. LA에 오시면 꼭 집에 와서 유물도 보시면 좋겠어요.

앵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립 안 커디: 감사합니다.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도산은 위대한 인물이었고, 역사는 진실이어야 진정한 역사가 된다는 겁니다.

앵커: 정말 공감합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필립 안 커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앵커: 다음에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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