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순 작가, 1894년 일본의 조선 침략은 전쟁..조선 정복이 목적
-침략 치밀히 계획, 일본군에 의해 한반도 약탈당하고 폐허로 변해
-당시 일본이 찬탈한 문화재 전부 반환해야
-윤석열 정부, 군국기무처로 불려도 손색없는 매국 정권

 

유럽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 강연회가 프랑스 시간으로 지난 25일 오전 11시 30분(한국시간 25일 저녁 6시 30분)에 줌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이 강연회는 ‘6.15 공동선언 실천위원회 유럽본부’에서 새롭게 이름을 변경해 재출범한 ‘자주하나유럽동포평화연대(자유연)’가 주최했으며, 박해순 작가가 초청되어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 침략 역사를 주제로 줌 강연을 진행했다. 이번 강연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한일 관계와 동북아 정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기획되었다.

장일중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결코 허락할 수 없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며 강연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서 이장희 박사가 축사를 통해 “한반도가 다시는 강대국들의 패권 전쟁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한다”고 전하며 강연회의 의미를 더했다.

박해순 작가는 일제 강점기와 19세기 말의 역사를 깊이 탐구하며, 특히 일본에 남겨진 문서들을 철저히 분석해 책을 저술해 왔다. 1990년부터 2017년까지 우리문화연구소, 공주민속극박물관, 군사문제연구소 등에서 일제 강점기 관련 서류와 문서들을 번역하고 연구해 온 박 작가는, 2017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책 저작에 집중하고 있다.

박 작가는 “우리가 일본의 침략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계획과 실행 과정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며, “이러한 연구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한일 관계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작가는 “1894년 하면 갑오경장,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은 알고 있는데, 정작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그림과 문서로 이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1894년을 갑오왜란으로 명명하며, 당시 일본의 내무성, 외무성, 참모본부, 육군성, 그리고 해군성 등 일본 정부가 남긴 문서를 중심으로 연구한 내용을 소개했다.

박해순 작가는 강연에서 일본 참모본부의 기밀자료로 특별관리되었던 ‘일청전사강의조교록’을 소개하며, 이 문서에는 1894년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세운 작전 계획과 조선 진입 경로, 참모본부 주요 인물들의 역할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테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 총독)의 지휘 아래 해상 수송과 군수 징발을 담당하며, 민간 선박을 비밀리에 준비해 출병을 결정했다. 1894년 6월 2일, 일본 내각은 조선 출병을 공식화하고 민간 선박을 징발해 병력을 수송했다. 이 과정에서 참모본부 고위 인사들과 일본 우선 회사의 부사장 곤도 겐베이가 비밀 협약을 체결하는 등, 일본의 침략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됐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1894년 6월 9일, 일본은 특수부대인 육전대 488명을 인천에 상륙시키고, 10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특히, 이들은 남산에 기관총과 대포를 설치하며 조선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목표로 일본의 침략 계획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다.

12일에는 혼성여단 선발대 1,123명이 인천에 도착해 13일 서울에서 육전대와 교대했으며, 16일에는 혼성여단 1차 수송이 완료되며 선발대를 포함해 보병 제11연대 4,213명이 인천에 상륙했다. 27일에는 혼성여단 2차 수송이 완료되었고, 보병 제21연대 3,962명이 인천에 도착해 6월 말경에는 총 8천여 명의 일본군 병력이 서울과 인천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은 6월 28일 왕궁 침탈을 결정하고, 7월 23일 조선 왕궁을 침탈했다. ‘조선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조선 침략을 전쟁으로 인식했다.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쓴 ‘켄켄록’의 7월 23일 자 기록에는 ‘조선 정부가 완전히 일본 제국의 수중에 들어왔다는 쾌보가 일본에 일제히 전해졌다’고 적혀 있다. 또한, 메이지 27년 7월 23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마치 대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같은 모습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1894년 8월 17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일본의 본래 전쟁 목적이 조선 정복과 보호국화였음을 공식화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박해순 작가는 전했다. 또한, 8월 20일 체결된 한일 잠정 협동 조관에는 7월 23일 왕궁 근처에서 발생한 양국 군대의 우연한 충돌 사건에 대해 양측이 깊이 캐묻지 않기로 합의한 내용이 포함되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94년 7월 27일부터 1895년 7월 6일까지 진행된 갑오개혁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남긴 기록인 ‘켄켄록’에 따르면, 일본은 이 개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이 단 1이라도 희생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이를 위해 조선에 임시 행정 기구인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총재 김홍집을 비롯한 의원들이 개혁안을 기초했다. 그러나 이 군국기무처는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합의체로, 당시의 개혁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간섭을 제도화한 것이었다.

박 작가는 현 정부의 행태가 우리나라에 단 1의 이익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어 현재의 윤석열 정부는 군국기무처로 불려도 손색없는 매국 정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박 작가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단순한 전쟁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침탈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1894년 경복궁 침탈 당시,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해 군함으로 일본에 반출했다는 기록이 면암 최익현의 면암선생문집과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이 약탈한 문화재를 모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참석자들 간에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조선왕조의 무력한 대응을 지적하며, 1894년 일본군의 침입에 대해 조선이 무대책으로 대응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해순 작가는 당시 조선의 군사적 무능력과 일본의 강압적인 태도를 설명하며, 조선이 당시 군사적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배경을 설명했다. 다른 참석자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며, 현재 정부의 정책이 과거의 무능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과 미국 간의 협약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언급하며,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연구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고 현재의 정책에 반영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 강연회는 유럽 동포들에게 조선의 역사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동북아 평화를 위한 유럽 동포들의 역할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최 측은 앞으로도 다양한 역사 강연과 행사를 통해 동포 사회의 역사의식을 높이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1894년 조선 침략 과정

1894년 3월: 일본 참모본부는 서울의 공사관부 무관인 와타나베 테츠타로에게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및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실제 조사를 명령.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당함. 참모본부는 제2국장 이지치 코스케에게 5월 5일 조선으로 건너가 동학난 실태 조사를 명령.

1894년 5월 5일: 이지치 코스케와 와타나베 테츠타로가 부산에 도착, 동학 진압을 위한 파병 계획을 논의.

1894년 5월 25일: 이지치 코스케와 와타나베 테츠타로가 도쿄로 돌아와 참모 차장 가와카미 소로쿠에게 보고. 조선에서 일본 세력의 유지를 위해 청국보다 많은 병력 규모의 혼성여단 파병을 제안.

1894년 5월 31일: 내각의 총리 대신 이토 히로부미, 외무 대신 무쓰 무네미쓰, 가와카미 소로쿠가 수상 관저에서 1개 사단 병력 파병 결정.

1894년 6월 1일: 참모본부 총장으로 다루히토 친왕을 총괄시키고, 육해군의 조선 파병 명령서를 하달.

1894년 6월 2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조선 출병을 공식 결정, 1개 사단 대신 혼성여단 파병 결정.

1894년 6월 4일: 참모본부는 민간 선박 10척을 징발, 가와카미 소로쿠는 일본 우선 회사의 부사장 곤도 랜베이와 비밀 협약 체결.

1894년 6월 5일: 조선 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요코스카 군항에서 야에야마함을 타고 조선으로 출발. 히로시마에 해군 최고통수기관 대본영 설치. 해군 대신은 조선 임시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가능한 많은 수의 육전대(특수부대) 편성 명령 전보 발송.

1894년 6월 6일: 민간 선박 와카노우라마에 출항 준비 통보

1894년 6월 7일: 일본에서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엄중 항의

1894년 6월 8일: 청국 병력 천 명 아산 도착.

1894년 6월 8일: 민간 선박 와카노우라마로 우지나항(히로시마항) 도착해 혼성여단 선발대 1,123명을 싣고 출항 준비.

1894년 6월 9일: 혼성여단 선발대 실은 와카노 우라마로 선박 우지나항 출발. 오토리 게이스케는 인천항에 도착해 육전대 편성 명령. 청국 복권성에 있던 이토 유코 상비함대 사령관이 인천에 들어와 마쓰시마, 치요다, 야에야마, 야마토, 아카기, 치쿠시 등 6개 군함에서 정예요원 488명을 선발해서 연합해군 육전대 편성 후 인천 상륙.

1894년 6월 10일: 오토리 게이스케가 육전대와 함께 인천 영사관에서 서울로 출발, 오후 5시 포병부대가 용산 도착, 오후 오후 6시 45분에 소총부대가 일본 공사관에 도착을 하고 육전대는 남산에 주둔.

1894년 6월 12일: 혼성여단 선발대 1,123명 인천 도착

1894년 6월 13일: 혼성여단 선발대 서울 도착해 육전대와 교대

1894년 6월 12-16일: 혼성여단 1차 수송 – 보병 11연대 (선발대 포함) 4,213명 인천 도착

1894년 6월 27일: 혼성여단 2차 수송 – 보병 21연대 3,962명 인천 도착

1894년 6월 28일: 왕궁침탈 결정

1894년 6월 29일: 혼성여단 병력 서울 집중, 조선왕궁 점령 진격 대기 명령 하달

1894년 6월 30일: 혼성여단장에게 왕궁 포위 전보, 병력 진격 철회

1894년 7월 12일: 대본영·일본정부 계획 실행 명령 하달

1894년 7월 21일: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계획

1894년 7월 23일: 조선왕궁 침탈

1894년 10월 27일: 가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이 동학당 살육 명령

1894년 10월 29일: 이천 옥사에 구금된 동학당 10명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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