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보내 달라”는 김련희 씨…벌써 14년째
-평양의 평범한 아줌마, 군의관 남편 따라 지방 거주한 일화도 공유
-딸 련금 양 그리워하며 영상 편지 남겨
“저는 그냥 평양의 평범한 아줌마였어요.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직장 다니며 지냈죠.”
2011년 9월 한국에 입국한 뒤 올해로 14년째 출국금지 조치와 함께 한국에 거주 중인 북한이탈주민 김련희 씨는 JNC TV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근황과 북한에서의 일상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 시민입니다』의 저자인 김 씨는 “2016년 베트남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일이 지금까지 재판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한 달에 한 번씩 법원에 출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평양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평범한 여성으로, 정치와는 무관하게 가족과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북쪽은 집단주의 사회이기에 가족만큼이나 직장 동료들도 소중했다”며, 힘들 때 동료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6년 전 외신 기자가 평양에 있는 그녀의 직장을 방문했을 때, 동료들이 “보고 싶다, 빨리 와”라고 말하는 영상을 보내온 적이 있다며, “그 순간은 잊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고 회고했다.
평양 외에도 평북 선천과 평남 개천 등 지방에서 총 10년간 군의관인 남편과 함께 생활했던 김 씨는 “서울의 빌라에 살고 있지만, 지방에서의 텃밭 생활이 더 그립다”며 “북에서 30평 정도의 텃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하며 먹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지방과 평양의 차이에 대해서는 “평양은 도시의 모습이지만, 지방은 농촌 분위기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라며 “문화적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고 전했다.
김 씨의 남편은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 중이다. 김 씨는 과거 남편이 환자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요청했던 반찬을 직접 만들어 병원에 전달했던 일화를 들려주며, “그게 나중에는 귀찮기도 했지만, 환자를 위한 진심 어린 정성이 회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 역시 의사로, “화상 환자에게 자신의 피부를 이식했을 정도로 의사로서의 책임감을 몸소 실천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의료는 무상으로 제공되지만, 김련희 씨는 중국 방문 당시 병원 진료에 돈을 요구받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중국도 사회주의 국가라 의료가 무료일 줄 알았는데 돈을 내라고 해서 놀랐다”며 “의료는 최소한의 인권 복지로, 국가는 이를 책임져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녀는 북한의 의료 및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의 의료 시스템은 지역 기반의 담당제 진료 체계로 운영된다. 주민들은 병원이나 보건소에 무작위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배정된 담당 의사가 정해져 있다. 이 의사는 환자가 태어난 순간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건강 상태를 문서로 인계받아 지속적으로 관리하며, 환자가 아프다고 연락하면 집으로 직접 왕진을 오기도 한다.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원을 찾기보다는 담당 의사를 통해 평소 건강을 관리받는 구조다.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 북한은 철저한 국가 공급 및 평등 중심 체계를 갖추고 있다. ‘월급’보다는 국가가 기본 생활을 보장해주는 ‘생활비’ 개념이 있으며, 주거·의료·교육·식량·술·담배까지 인원수에 따라 공급된다. 의사와 같은 전문직도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개념으로 분류되며, 직업 간의 임금 차이보다는 기술 등급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 대학 진학률은 약 30%에 불과하며,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직장에 취직해 해당 분야에서 실무 중심의 교육을 받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현장 중심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구조다.
한편, 김련희 씨의 딸 김련금 양은 헤어질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나, 현재는 평양에서 요리사로 근무 중이다. 김 씨는 련금 양을 그리워하며 영상 편지를 남겼다.
그녀는 17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 남겨진 딸이 겪었을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홀로 성장해온 딸의 삶을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대학 입학, 생일, 사회생활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수없이 미안해하며, 그럼에도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준 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김 씨는 매년 “내년에 꼭 갈게”라는 다짐을 해왔지만, 어느덧 14년이 흘렀고, 여전히 딸을 만나러 갈 날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의 재회가 이루어질 그날, 딸이 해주는 따뜻한 집밥을 먹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며, 딸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며 사랑을 고백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출처 JNC TV를 밝혀 주실 경우 자유롭게 인용 보도 하실수 있습니다.)